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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백제의 유적지 2편 - 공주

by 키다리 두애아빠 2024. 3. 28.

오늘은 지난번 글에 이어서 백제의 유적들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중에 백제의 두 번째 수도인 공주에 있는 유적지들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주는 백제 시대에는 웅진으로 불렸던 곳입니다. 당시 외부의 침입으로 백제의 수도를 한강유역에서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기 때문에 백제는 수도 방어에 심혈을 기울인 흔적을 엿볼 수 있으나 동시에 백제의 뛰어난 문화적인 면도 같이 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적입니다.

 

백제의 공산성

 

공산성

백제의 공산성은 22대 왕인 문주왕이 도읍을 웅진(현재의 공주)로 옮긴 후, 26대 성왕이 다시 수도를 사비성 (지금의 부여)로 옮기기 전까지 백제의 왕들이 생활했던 곳입니다. 공산성의 북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110m 높이의 산 위에 있기 때문에 천연 요새입니다. 이는 백제가 얼마나 외부의 침략에 신경을 썼는지를 미루어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원래 백제 시대에는 흙으로 만든 토성이었습니다. 특히 백제의 공산성 판축기법으로 흙을 계속 다녀가면서 층층이 쌓는 방식으로 성을 만들었기 때문에 토성임에도 굉장히 단단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 중기에 돌로 다시 쌓아 현재의 모습으로 변모하였습니다. 백제의 공산성을 포함한 백제역사유적지구는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통과되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역사 유산입니다. 성곽 안쪽으로는 백제의 유적뿐만 아니라 신라, 고려, 조선의 유적들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연못터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건축양식이 특징인 곳입니다. 공산성의 연못터는 탑을 거꾸로 쌓은 모양으로 물을 저장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 물은 농업용수나 식수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깊은 연못터에서 물을 뜰 수 있도록 수면과 접근이 쉽게 계단시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허니 현재의 연못터는 백제 시대에는 영은사 앞쪽에 있던 것을 조선시대에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금강

금강은 공산성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어 성안의 사람들에게 용수를 공급해 줌과 동시에 성의 북쪽 방향을 침입으로부터 막아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문화와 교류의 강국이었던 백제가 공주에 머물던 어려운 시기에도 꾸준히 문화적인 교류를 이어갔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백제는 금강을 서해로 연결되는 통로로 사용했는데, 이는 백제의 개방성과 국제성을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노란 깃발

현재 공산성의 여기저기에 노란 깃발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백제의 고도' 공주를 상징하는 공산성의 깃발을 복원해 둔 것입니다. 공산성의 동서남북으로 청룡, 백호, 주작, 현무(사신도)가 사용되었습니다.

 

공산정

공산성의 전망대인 공산정은 성곽의 북쪽 높은 곳에 위치해있어서 성곽 안의 마을 대부분과 금강을 동시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입니다. 현재는 공시 시가지와 금강철교의 아름다운 풍경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백제의 무령왕릉과 왕릉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의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백제의 웅진 시대 왕실의 능묘군입니다. 과거에는 송산리 고분군으로 불려서 현재도 많은 자료에 기록되거나 사람들의 인식에는 송산리 고분군으로 자리잡고자리 잡고 있지만 정식명칭은 무령왕릉과 왕릉원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원래는 수십 여 기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현재는 무령왕릉을 포함하여 7기의 무덤만이 남아 있습니다.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무덤 중에 유일하게 주인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무덤입니다. 무령왕릉과 왕릉원에서 발견된 백제의 무덤은 두 종류인데, 굴식돌방무덤과 벽돌무덤이 그것입니다. 아치형의 벽돌 무덤인 무령왕릉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양식입니다. 이는 이전의 백제 시대의 무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양식으로 백제가 중국과 교류를 활발히 하면서 외부의 문화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개방적인 문화를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특히 무령왕릉 내부에서 발굴된 진묘수나 도자기, 목관, 장신구 등도 백제의 고유한 것이 아닌 중국의 영향을 받거나, 태국과 인도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낙화암

낙화암은 금강 (예전의 백마강) 변에 서있는 바위절벽입니다. 낙화암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사연은 조금은 기구합니다. 백제의 사비성이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점령당하던 시절에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수많은 궁녀들이 절개를 지키기 위해 낙화암에서 백마강에 몸을 던졌다고 합니다. 이 모습이 마치 꽃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하여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는 전설일 뿐 역사적인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정림사지 5층 석탑

정림사는 백제 성왕이 도읍을 옮기면서 만든 사찰로 왕궁의 정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정림사의 절터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높이가 8.33m이 이르는 높은 사탑입니다. 특히 탑신부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 민흘림기법을 적용한 탑으로 상승감을 주어 웅장함을 더 하면서도 부드럽고 단아한 세련된 백제의 건축양식을 느낄 수 있는 석탑입니다.

 

궁남지

궁남지는 궁궐의 남쪽에 특별히 따로 지은 궁궐에 딸린 연못입니다. 삼국사기에  '궁 남쪽에 연못을 팠다'라는 기록에서 궁남지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궁남지는 무왕시절에 20여 리나 되는 긴 수로를 파서 인공적으로 만든 연못으로 물가 주변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의 중앙 부근에는 섬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궁궐 조경에 물을 잘 활용 백제 시대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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