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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백제 건국 이후의 역사

by 키다리 두애아빠 2024. 4. 2.

백제 건국 초기에 온조왕이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긴 했지만, 당시 한강 지역은 목지국이 다스리던 마한의 영토였습니다.

 

금동대향로
백제의 금동대향로

 

백제를 건국 직후의 역사

기원전 18년에 온조왕이 백제를 세우고도 200여 년간 백제는 한강유역을 차지하지 못하고, 우리 역사에서는 크게 알려져 있지 않은 마한에 세력에 밀려 크게 성장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제 초기엔 아직 고대국가이고, 중앙집권적인 국가의 기틀을 잡기 전이었습니다. 그 무렵 마한 역시 54 부족의 연맹체로서 하나의 국가라기 보단 혈연 등으로 엮여있는 공동체 정도의 느낌입니다. 목지국은 그 연맹의 우두머리였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백제 한강 유역을 차지하다.

고이왕 (234-286)이 백제의 8대 왕으로 백제를 지배하던 시절, 246년에 마한과 낙랑-대방군 사이에 진한 8국 분할문제로 갈등이 있었다. 이 갈등은 전쟁까지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마한은 상대편의 태수까지 전사시키는 전투의 승리를 얻기도 했지만, 결국 전쟁에서는 패하며 국가의 쇄락 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고이왕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한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목지국을 무찌르며 한 장 유역을 장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세를 타서 인천까지 영토를 확장하게 됩니다. 이는 중국과의 교류를 활발하게 하는 결과와 관등제도를 정비하는 등 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백제의 중흥기 (4세기)

한강유역을 차지한 백제는 점점 발전된 국가의 형태를 갖추며 더욱 강해졌습니다. 4세기 중반인 근초고왕은 중국에 사신을 파견해 국가로서 인정도 받고, 일본과 교류를 활발히 하였습니다. 특히 15대 왕인 침류왕 (384-385) 때 불교를 받아들여 국교로 선포하였습니다. 불교는 향후 중앙 집권 국가에 백성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였습니다. 근초고왕은 게다가 남으로 마한을 정복함과 동시에 북으로도 북진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 중국 본토와 교역도 활발해지면서 중국의 야로시 지방까지 통치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백제는 고구려의 중흥기인 고구려왕 시기라서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고구려의 중흥으로 인해 도읍을 옮기다.

5세기에 이르러 고구려는 전성기에 이릅니다. 이에 북으로, 남으로 영토 확장 이뤄냈습니다. 이 시적 고구려의 장수왕은 적극적으로 남하 정책을 펼쳤고, 그 결과 백제의 개로왕은 사망하고, 한강유역 마저 빠았기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백제는 수도를 웅진 (현재의 부여)로 옮겼습니다. 이때가 475년, 백제의 21대 왕인 개로왕 시절입니다. 개로왕은 고구려의 침입으로 수도를 웅진으로 옮기면서까지 항전했지만, 고구려군에 의해서 사살되었습니다. 그리고 즉위한 22대 왕인 문주왕은 권력을 남용하다가 즉위 2년 만에 시해당했습니다. 왕권이 이렇게 약하다 보니 자연히 나라는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3세에 왕위에 오른 삼근왕은 당시에 백제를 괴롭히던 해구를 제압하고 나라의 안정을 찾으려 했으나, 불행히도 2년 만에 죽었습니다. 24대 백제의 왕위에 오른 동성왕은 백제의 왕권을 다시 회복시켰습니다. 그는 동성왕 15년에 사신을 보내 신라의 왕녀와 결혼을 했고, 그렇게 백제와 신라는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왕인 25대 무령왕 대에 이르러서는 다시 왕권이 안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영토도 넓히면서 동시에 중국과의 교역도 활발해졌습니다. 그는 전국에 22 담로를 설치하고, 왕족들을 관리로 보내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체제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면서 현대식 왕권국가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 번의 백제의 천도

무령왕의 아들인 성왕은 백제의 수도를 다시 한번 사비성 (지금의 부여)로 옮겼습니다.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면서 다시 백제는 더욱 부흥했습니다. 그는 선대왕에 이이서 강한 왕조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지방의 관리제도를 정비하고, 승려를 등용하면서 불교를 백성들에게 적극 장려했습니다. 그러면서 백제의 국민들은 하나로 통합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의 백제는 왜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했습니다. 성왕은 고구려의 왕권이 약해진 타이밍에 다시 한강 유역을 수복하기도 하였지만, 신라의 진흥왕에게 빼앗기며 신라와의 동맹도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왕은 554년에 신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였습니다.

 

백제의 멸망

성왕 이후의 백제는 신라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으면서 나라를 지켜왔습니다. 그로부터 약 50여 년이 흐른 후 30대 왕인 무왕이 왕권을 잡았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백제를 일으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신라를 공격하며 다시 한번 영토를 회복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약 40여 개의 성을 다시 되찾았습니다. 백제의 30대 왕인 무왕 시절에 백제는 신라에게는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 갈등이 있었던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했습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천도를 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 시절, 신라는 백제와 당나라 간의 외교적인 교류를 압박했습니다. 이에 신라의 침략에 대응하는데 한계를 느꼈습니다. 오히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공격을 해왔고, 660년에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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