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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백제 왕조 - 근초고왕 이전(1편)

by 키다리 두애아빠 2024. 3. 21.

이번 글에서는 백제의 왕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백제의 왕조는 약 700년이 이어져오면서 31대 의지왕까지 이어졌기에 두편으로 나눠서 글을 적도록 하겠습니다.

 

1대 온조왕 (B.C. 18-A.D. 28)


기원전 18년에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은 고구려의 셋째 왕자로 고구려 남쪽의 마한지역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웠습니다. 마한은 온조왕에게 북쪽 영토의 일부를 내어주어 그 영토를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온조왕은 세력을 모아서 마한을 통일하고 백제라는 700년 역사를 가진 나라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백제 왕조 계보
백제 왕조 계보

백제의 초기 왕조 : 10대 분서왕까지


2대 다루왕 (28-77년)

다루왕은 온조왕의 첫째 아들로 마한을 완전히 흡수 하였고, 북쪽 지역의 말갈족의 침입에도 영토를 굳건히 지켜냈습니다. 이후 영토 확장과 신라와의 분쟁에 집중하게 됩니다. 또한 다루왕은 쌀농사를 널리 보급시켜 백제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이뤄내어 큰 번영을 누린 시기였습니다.

3대 기루왕 (77-128)

기루왕은 2대 다루왕의 맏아들로 왕권을 물려받았습니다. 기루왕은 친 신라적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신라가 말갈과 전투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는 구원병을 보내 신라를 위기에서 구해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왕권에 앉아있는 동안 평안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나라에는 천재지변이 끊임없이 일어나며 백성들은 너무 힘들어 했습니다. 결국 한 때 왕좌를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6년 동안 왕좌를 빼았겼다가 4대왕인 개루왕 (기루왕의 맏아들)의 도움으로 다시 왕위에 앉기도 했습니다.

4대 개루왕 (128-166)

3대 기루왕의 첫째 아들입니다. 한 때 아버지가 왕좌를 빼았겼지만, 개루왕의 도움으로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개루왕은 아버지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신라를 대하였습니다. 개루왕이 왕권을 잡은 이후에 단 한번도 신라에 사신을 보내거나 받아주질 않았습니다. 한번은 신라에서 반역자로 쫓겨난 길선이 백제로 도망쳐온 적이 있었습니다. 신라는 개루왕에게 반역자를 환송해달라고 요구하였지만, 개루왕은 이런 요구마저 수용해주지 않았습니다. 이를 빌미로 신라와 백제는 전쟁을 벌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개루왕의 백제는 강했습니다. 신라는 개루왕 시대 때, 백제의 기에 눌려 갈등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개루왕은 또한 북쪽의 말갈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한상성을 쌓기도 하였습니다.

5대 초고왕 (166-214)

개루왕의 장남인 초고왕이 왕위에 오른 후에 백제는 신라와 갈등이 더욱 커졌습니다. 이에 신라와 끊임없이 전투를 치뤄야 했고, 설상가상으로 메뚜기떼까지 창궐하면서 나라가 파탄지경에 이르기까지 했습니다.

6대 구수왕 (214-234)

구수왕은 초고왕의 장남으로 키가 2미터가 넘는 장신으로 유명합니다. 게다가 외모도 친근하여 백성들과 신하들의 사랑을 훔뻑받는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왕때부터 이어진 신라와의 갈등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봉산전투에서 크게 패한 이후로 신라와의 전투를 비했습니다. 구수왕이 왕위에 있는 동안 신라와의 전쟁은 멈췄지만, 전염병이 돌고, 홍수까지 나는 등 천운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왕이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는다고 해도 백성들의 생활이 힘들어지면 더 이상 나라가 평온할 수가 없었죠. 이 때를 틈타 북쪽의 말갈족도 다시 침략을 계속 하곤 했습니다.

7대 사반왕 (234-234)

구수왕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너무 어린 나이에 집권하면서 난에 의해서 폐위당했습니다.

8대 고이왕 (234-286)

7대 사반왕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왕권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의아한 점은 삼국사기에는 고이왕이 4대 개루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나와있지만, 시기적으로 맞지 않아 정사로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고이왕이 불미스러운 일로 왕권을 잡기는 했지만, 고이왕 시대의 백제는 크게 발전했습니다. 외교적으로도 유연하게 대처했습니다. 초기에는 신라에게 강경책을 쓰고, 말갈과는 친하게 지내다가 그 후에 신라도 유하게 대했습니다. 이 시기에 백제는 중국의 북위와도 전쟁을 치루고, 중국까지 영토를 넓히는 등 강한 백제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라 안으로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관리 체계를 6관 16품제를 도입하여 기틀을 잡았고, 법제도를 재정하여 나라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이는 고대 국가에서 한단계 진화한 중앙 집권 체제를 이뤘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9대 책계왕 (286-298)

고이왕의 장남인 책계왕은 선왕이 이루어놓은 안정된 국내 정치를 바탕으로 영토 확장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낙랑과의 전쟁중에 사살되었습니다.

10대 분서왕 (298-304)

분서왕은 책계왕이 전쟁에서 사망한 이후 즉위했습니다. 그는 낙랑의 주요지역들을 탈환했으나 계속 적대적인 관계로 지냈습니다. 그래서인지 분서왕 7년에 낙랑이 보낸 자객에 의해서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2개의 왕조로 나눠진 백제

 

11대 비류왕 (304-344)

선대 왕들과는 다르게 분서왕의 아들이 어리기에 왕권을 탈환하여 왕에 올랐습니다. 삼국사기에는 비류왕이 6대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나와 있지만 고이왕과 마찬가지로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분서왕의 아들들과 신하들은 대륙백제로 넘어가서 다른 왕조를 이뤘습니다. 그러면서 백제는 2개의 왕조가 존재하는 갈등의 시대를 맞았습니다.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천재지변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외교적으로는 말갈, 낙랑, 고구려와 친화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신라에만 강경책을 펼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습니다.

12대 계왕 (344-346)

10대 분서왕의 맏아들로 비류왕을 피해 대륙 백제로 가서 스스로 왕조를 이뤘고, 비류왕이 죽은 이후 스스로 백제의 정통 왕임을 천명하였고 한반도 백제로 돌아왔지만, 11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인 근초고왕에 패배하였습니다. 그렇게 백제의 나눠진 왕조는 끝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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