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이 3국으로 갈라져 있다가 처음으로 하나의 통일을 시킨 나라가 신라입니다. 신라 역사의 최고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534년에 태어나서 42세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540년에 8살의 어린 나이로 신라의 24대 국왕으로 올랐습니다. 비록 42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워낙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재위 기간은 짧지 않았습니다.
역사 상 대표적인 정복 군주로 평가받는 진흥왕
진흥왕은 신라 역사상 최고의 정복자로 손꼽히는 명군입니다. 신라에는 진흥왕이 있다면, 백제에는 근초고왕과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역사적으로 성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들이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정복군주로 평가받는 명군인 동시에 자비 마립간, 소지 마립간, 지증왕, 법흥왕의 뒤를 이어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진 능숙한 현군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진흥왕 시대를 전후로 신라는 실질적으로 역사상 백제를 뛰어넘고 고구려와 대등할 정도로 강성해지면서 6세기 전반에 걸쳐서 전성기를 지내게 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진흥왕의 정복전쟁을 계기로 신라는 향후 100여 년 동안 백제와 고구려를 동시에 맞닥뜨리게 되는 형세에 놓이게 되면서 소모적인 양면전선에 휘말리기도 했습니다.
신라의 24대 왕 : 진흥왕이 장자가 아닌데도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사연
진흥왕의 아버지는 성연왕입니다. 하지만 다른 왕들과 달리 선왕의 장자가 아니었습니다. 장남은 동륜태자가 되었습니다 동륜태자는 머리를 깎은 승려입니다. 장자가 승려가 되면서 왕위와는 멀어졌습니다. 그가 승려가 된 것이 자발적인 것인지, 어쩔 수 없이 된 것인지 까지는 역사적인 기록이 없습니다. 그는 선왕인 성연왕보다 먼저 세상과 멀어졌고, 그 다음 후계자이자 차남인 진지왕은 기록 상 행실이 좋지 않아 폐위되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몇몇 역사학자들은 다르게 주장하는 것도 있습니다. 한쪽의 주장은 진지왕의 행실도 그렇게 문제가 아니고, 능력도 부족하다고 할 수 없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행실이 막장이라는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고 《삼국유사》에만 나오는 기록입니다. 만일 그의 행실이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면 두 가지 역사서 모두에 동일하게 기록이 되어 있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백제의 위덕왕이 3만 대군을 이끌고 신라를 침공했다가 대패하고 이로 인해 성을 새로 쌓는 등 업적은 제법 괜찮았습니다.
한 나라 최고의 역사를 이끌어준 진흥왕
그는 명실공히 신라의 가장 위대한 정복군주였으며, 한국역사상으로는 광개토왕, 공초고왕, 역대 왕들과 함께 국토를 크게 확장한 군주로 평가되었다. 진흥왕이 고대사에 끼친 큰 영향은 백제와 고구려가 백제와 고구려를 상대로 벌이는 한반도 패권 다툼의 틀을 거의 수백 년에 걸쳐 실현했다는 점이다. 신라는 지서왕과 법흥왕만으로 나하동맹처럼 가변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한반도 전체의 최강자가 되기 위한 경쟁에서는 공초고왕과 광개토왕으로 대표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이 구조를 뒤흔든 왕이 바로 진흥왕이었다. 신라는 한반도 중부지방을 장악했고, 백제는 바다를 제외하면 사실상 고립된 군사국가에 빠졌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도 잃었고, 수도 평양에서 멀지 않은 국경을 언제든지 위협할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는 과거에는 그다지 존재감이 없었지만, 신흥 강국인 신라에 막 등장한 것처럼 국력을 쏟아부으며 맹렬한 공격을 가해야 했다. 특히 백제는 상황을 이전의 상태로 바꾸기 위해 계속해서 맹렬한 공격을 펼쳤지만, 도리어 성왕이 전투에서 전사한 이후 어려운 시기를 겪었습니다. 온달전설에서도 언급되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신라가 일시적으로 진압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 결과 진흥대왕까지 확장된 북쪽 국경은 함경도를 제외하고 고구려 멸망까지 신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신라왕조 시대의 영토 확장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신라는 문무왕대에서 본격적인 권력집중화를 시작했는데, 신라는 문무왕대년에 가야와 백제 연합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고 결국 중앙집중화가 지연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후, 신라는 정평왕, 성연왕, 진흥왕을 거치면서 확실히 고대 중앙집권국가로 변모했습니다. 이는 한국이 고구려, 백제와 맞먹고, 두 나라를 흡수하고 통일할 수 있는 강력한 정복국가가 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신라는 삼국통일을 위해 험난한 과정을 겪었으나 진흥왕의 영토 확장으로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동맹을 맺고 신라와 협력하게 되면서 진흥왕, 정평왕, 선덕여왕이 개국을 이루게 된다. 동맹. 오히려 7세기 중반까지 위기에 모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여왕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신라는 한강을 점령하고 서해로 통하는 통로를 얻었고, 이때부터 중국과 직접 교역이 가능해졌습니다. 크게 보면 당·신라 대 고구려·백제·와국의 삼국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진흥왕 후반기에 혼란을 겪고 있는 신라의 역사
진흥왕은 폭발적인 성장을 이끌었지만, 신라의 입장에서는 일찍 세상을 떠나 그 기세가 빠르게 무너진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신라의 후계자인 성연왕이 4년 만에 폐위되면서 확장에 필요한 세력을 낭비했고, 신라는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할 때까지 오랫동안 진흥왕이 만든 판에 계속 의존했는데, 100년이 넘은 일이었습니다. 이는 계속해서 강력한 수비 자세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진흥왕은 42세에 세상을 떠났고, 당시 평균수명이 낮았다고 하는데, 그래도 40대 초반은 여전히 활동적인 연령이었습니다. 진흥왕과 진지왕을 제외한 당시 신라의 왕들이 대부분 50~70세에 살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진흥왕은 조금 일찍 세상을 떠나 가문의 세력에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일각의 비판도 있지만 진흥왕대에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신라의 확장으로 난관에 빠진 백제는 무왕, 채왕을 앞세워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해 한때 한강유역을 장악했습니다. 평양성을 비롯한 성이 함락되고, 고구려도 맹렬한 공격을 가해 후대왕인 정평왕도 어려움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당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신라는 백제에 의해 멸망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본토인 경상도까지 침투했는데, 고구려당전이 없었다면 주부산전투에서는 15만명, 금산산에서는 20만명, 그리고 신성군과 국내 지원군 출신의 40,000명의 병사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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