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역사에서 혼란의 시기를 지나 처음으로 하나의 나라로 통일시킨 신라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라는 고대 국가라는 개념이 있기 전부터 삼국을 통일한 통일 신라가 되기까지 천년을 이어져 왔기 때문에 천년 왕국 신라라고도 불리웁니다.
신라의 초반 역사와 그 의의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한반도의 남쪽에 위치해 있던 작은 부족국가인 사로국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신라의 건국은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에 의해서 세워졌다고 전해집니다. 박혁거세의 건국 신화는 아래 글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박혁거세가 경주 지역에 신라를 세운 후에 그 지역의 기존 토착 세력과 이민 세력을 흡수하며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건국하였습니다.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고대 국가 체제로 발전하기 시작한 신라의 역사
비록 청동기 시대에서 역사가 시작되었지만, 사실 신라는 뛰어난 철기 기술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진보한 철기 바탕으로 주변에 세력을 정복하였습니다. 신라는 점차 발전하였지만, 지리적으로 한반도 동남쪽에서 자리잡고 있어서 중국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이는게 상대적으로 늦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나 백제보다는 늦은 4세기 경이 되어서야 고대 국가 체제를 갖추게 됩니다. 그 이전까지는 왕이라는 칭호도 없이 마립간이라는 호칭으로 통치자를 칭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두머리를 뜻하는 칭호도 왕으로 바뀌고, 통치 체제가 정비되고, 왕권이 강화된 것은 4세기 후반 무열왕 때 입니다. 이때서야 비로소 고대 국가로 성장하였습니다. 왕위 계승 또한 김씨 왕권을 확립하고, 자녀에서 왕권을 계승하는 것을 확립하였습니다. 또한 무열왕은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여 낙동강 동쪽에 지난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대외적으로는 고구려 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 들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무렵 가야와 왜의 연합 세력이 신라의 영역을 침입하여 있는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아 물리친 일이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한동안 고구려의 정치적 간섭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신라는 자주성 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433년 보인왕 때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백제와 동맹을 맺었고, 493년 무령왕 때 백제와 혼인 동맹을 체결하며 동맹을 강화하였습니다.
지증왕 나라의 이름을 신라로 바꾼 역사적 의의
6세기 초 지증왕은 나라 내부적인 정비를 시작하였습니다. 지증왕은 나라 이름을 새로워 진다는 의미의 "신"과 사방을 망라한다는 의미의 "라"를 합쳐 "신라"로 정하고 왕의 칭호를 마립간에서 중국식 어휘인 "왕"으로 바꾸었습니다. 중앙은 수도와 지방의 행정구역도 정리하였는데 지방 행정 구역을 주 군 으로 나누고 관리를 파견하여 관리 하였습니다 또한 이사부를 보내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정발하였고 경상도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력 증대를 위해 노동력 확보를 위해 순장을 금지하였으며 수도에 시장을 열고 이를 감독하는 관청인 전을 동시에 설치하며 상업을 장려하였습니다. 지증왕의 뒤를 이은 법흥왕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율령을 전파하였습니다. 귀족 회의 대표자인 상대등이 회의를 주관하게 하였고 지배층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도를 정비하였으며, 관리 등급을 17 등급으로 나누어 복색으로 서열을 9분하는 등 관등제 정비에 힘을 썼습니다. 또한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고 병부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김혜지역의 금관가야를 병합하였습니다. 중국과 대등한 나라임을 나타내기 위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527년 불교를 받아들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습니다.
신라의 역사 상 전성기를 만든 진흥왕
6세기 중반 진흥왕 때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진흥왕은 불교 진흥을 위해 흥륜사를 건립하였고 불교 집회 등을 통해 나라의 통합과 발전을 기원 하였으며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하였습니다. 화랑도는 화랑을 우두머리로 한 청소년 수련 단체로써 교육과 군사, 사교 단체 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진흥왕은 백제 성왕과 연합하여 한강 상류 지역을 차지한 이후 다시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 지역을 빼앗아 한강유역을 모두 장악하여 씁니다. 이어 대가야 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였으며 북쪽으로는 동해안을 따라 함흥평야 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진흥왕은 이러한 영토 팽창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 단양 신라 적성 비와 창녕 첩경 뒤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나운영 순수비 등의 비석 을 건립하였습니다. 순수란 원래 천자가 천하를 돌아다니며 산천의 재사 를 지내고 지방민심을 살피던 순수비를 뜻하는데 진흥왕은 자신이 확장한 국경을 살펴보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순수비를 세웠습니다. 진흥왕은 왕권 강화와 강해진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짐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스스로를 태왕 이라 칭하여 쓰며 독자적 연어 를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역사서인 국사를 편찬 하도록 하였습니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함으로써 3 북항 쟁의 주도권을 차지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당 항성을 통해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역로를 확보하여 지리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고 농사에 유리한 비옥한 토지를 확보하여 경제 기반을 확충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즉위한 진평왕의 은 고구려를 치기 위해 원광 으로 하여금 수 나라의 군사를 청하는 그린 걸 사표를 3 짓게 하였습니다 뒤를 이어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신라 왕 위에 오른 선덕여왕은 첨성대를 건립하여 있고 자장에 거의 로 황룡사 9층 목탑 꽈 분황사 모전석탑 을 세웠습니다 7 않은 선덕여왕 시기에 백제 의자왕 의 공격으로 대야성 을 비롯한 40여 개 성이 함락될 며 국가적 위기를 맞아 였습니다 이에 김춘추가 고구려에 동맹을 요청 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뒤를 이어 주기 1 진덕여왕 은 성국 통일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집사 불을 설치하며 장관을 중 시라 친 하였고 당나라의 김춘추를 파견하여 나당 동맹을 성립시키는 등 친당 외교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렇듯이 신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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